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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서재

내가 꿈꾸는 서재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책이 없었다.

부모님은 먹고 살기에 바빴고, 삼 남매는 그저 밤낮으로 뛰어놀기에 바빴으니까. 집안에는 책을 읽는 사람도 없었고, 아니 먼저 읽을 책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책을 읽는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책상 옆 책장에 기억 나는 것은 아마도 어디선가 물려받은 듯한 낡은 위인전 한질 뿐.

방학이면 주로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에 가 있곤 했는데. 거기는 진짜 시골 중에 시골이라 그 동네에는 슈퍼는 커녕, 맞붙어있는 옆집도 없어서 몇 걸음씩 걸어야 옆 집에 갈 수가 있었다. 또래 아이들은 물론 없었고 소를 먹이고 농사를 짓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계신 시골이었다. 지금은 허물어진 그 시골집을 생각해보면 마당에 흐드러진 감나무 너머 보이던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떠오르는데 밤 중에는 그 흔한 가로등도 없는 곳이라 유독 달이 더 밝았던 것도 같다.

낮에는 농사를 짓느라 다들 밖에 나가 계시기 때문에 낮의 시골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놀거리를 찾아서 마당에서 산에서 개울에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스케치북, 크레파스도 사치였던지 할머니네 집 벽 한켠에 걸려있는 큰 달력 뒤 편에다가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오일장에 나가시는 할머니께 부탁했더니 모나미 볼펜을 하나 구해주셔서 그 볼펜으로 여기저기 그림을 그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아이들은 풍경을 그릴때 사진을 찾아볼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할머니집 마당에 앉아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산등성이며 하늘이며 논밭을 그리곤 했다. 생각해보면 참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를 먹이느라 아침과 밤에는 가마솥에 소 여물을 쑤시는 할머니집에 불쏘시개로 쓰라고 어느 누군가 가져다놓은 한국 전래동화전집 한 질이 생겼다. 낡은 종이는 불 붙이기에 딱 좋은 거친 누런 갱지 재질의 책이었고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읍니다 체로 끝나는데다가 드문드문 하얀 책벌레가 나와 기어다니기도 했다.

논밭을 쏘다니는 것도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는 것도 모나미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지겨웠던지 어느날 나는 마당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그 동화들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동화전집 한질 그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아무렇게나 버려진 손톱을 먹고 사람으로 둔갑한 쥐 이야기며, 콩쥐팥쥐, 고려장, 효녀효자 이야기 등등. 할머니 할아버지께 절대 태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그 책들을 보고 또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초등학교 교실의 학급 문고의 책들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고 (집에는 책이 없었으므로), 중학교 때는 도서실의 책들을 모두 읽겠다는 각오로 책 맨 뒷장에 꽂힌 도서대여 카드에 내 이름 적어넣기에 집착했으며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고등학교때는 자진하여 도서부에 입회하였다.

약간 무언가를 읽고 있고 싶은 압박이 들어서 (문자 중독까진 아니었던 것 같지만) 스마트 폰이 없던 시절에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야할 일이 있으면 근처 편의점에서 신문이라도 사서 읽어야 왠지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때의 한이 있는 탓인지. 나는 지금도 책에 집착하는 편이다.

일단 책을 사면 뿌듯하다. 책들이 즐비하게 꽂힌 책장을 보면 배가 부르다. 돈이 없던 시절에도 일단 책부터 샀다. 배는 고파도 마음의 양식은 줄이지 말자는 자기암시를 외면서. 좋다는 책이 있으면 사고싶다. 내 책장에 꽂아두고 싶다. 그래서 아직 사두고서 읽지 못한 책들이 꽤 있지만… 상관없다. 책장에 꽂혀있는 이상. 언젠가 읽을것 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

하지만 우리집의 벽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도 수용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책을 사고 방출하기를 반복하는 편인데.

내가 꿈꾸는 서재 는

바로 먼 훗날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로 가득 채워진 서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아이들이 커서 글을 읽게 되면 책장을 서성이다가 아무 책이나 집어들 날이 오겠지. 때로는 책 기둥에 쓰여진 제목에, 저자의 이름에 이끌릴 수도 있을 것이고 우연히 꺼내든 책표지에 마음이 끌릴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나이 터울이 있는 언니가 있는데. 청소년기의 나는 언니의 책장에 꽂힌 책들을 골라 읽기를 좋아했다. 대학생이었던 언니의 책장에는 안도현, 류시화의 시집, 이미륵의 자전소설, 민음사의 세계문학 전집들이 꽂혀있고는 했는데. 그냥 손에 집혀서 읽었던 그 책들이 더욱 읽기의 즐거움에 빠지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언젠가 커서 우리집 책장을 서성이게 될때 아무렇게나 집어들 그 책들이 마찬가지로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때때로 책장에 꽂힌 책들의 목록을 살피곤 하는 것이다.

우선, 잔혹하거나 선정적이거나 왜색이 짙거나 너무 자극적인 소재의 책들은 읽고나서 바로 되파는 편이다. 반면, 도서 스트리밍으로 읽었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가 깊은 감명을 받아 언젠가 가족들과 같이 읽고 싶다는 생각에 종이책을 사서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소설에는 미안하고 고전에는 감탄한다.

요즘 세련되게 쓰여진 현대의 에세이집 중에서도 좋은 가치관을 잡아줄만한 책들이 많은 것 같다. 인터뷰 집들도 좋고. 어릴때는 만화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던지라 종이로 된 만화책 완결판을 사두기도 한다. 언젠가 같이 귤까먹으면서 함께 둘러앉아 만화책 보는 날이 오려나.

스티븐 킹의 작법서의 이름으로 둔갑한 자전적 에세이에 가까운 <유혹하는 글쓰기> 나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정세랑의 <피프티피플> (한 사람의 머리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니?! 감탄)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는 스트리밍으로 읽었다가 종이책을 따로 마련한 경우다.

그리고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집착하는 편인데. 그 알록달록한 책기둥들이 나란히 열을 맞춰 세력을 불려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 한켠이 뿌듯하고 더욱 도서구매의 열을 불태우게 된다. 그런면에서 중고도서점을 애용하는 편인데 한때 가열차게 지점을 늘리던 알라딘, 예스24의 기세가 수그러 든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

세상은 넓고 좋은 책들은 많다. 어서 네 가족이 둘러앉아 책을 읽는 (만화책도 기꺼이 환영) 날이 왔으면.

그런데 일단, 한글부터 떼야겠지…?

지금의 우리집은 엄마아빠가 책을 꺼내들면 두 꼬마들이 우는 소리를 하며 달려들기가 일쑤.

하… 너네 언제 클래? 책들은 준비가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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