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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 생애와 대표작품 소개

앤디워홀 (1928년 8월 6일-1987년 2월22일)은 미국의 미술가로 팝아트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성공한 후 미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화제의 예술가였습니다. 

앤디워홀의 업적

앤디워홀의 예술세계는 회화에 국한되지 않고 드로잉, 페인팅, 실크스크린, 사진, 판화, 조각, 영상, 음악 등 매우 다양한 매체들이 예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1984년 발매된 컴퓨터를 이용한 컴퓨터 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저작활동 또한 활발했습니다. [인터뷰] 매거진 창간을 비롯하여 [앤디워홀의 철학]과 [팝-이즘] 등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특히 자신의 회고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수많은 회고전, 자서전,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했습니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정도는 유명해질 수 있다”는 앤디워홀의 명언 중 하나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앤디워홀의 작품의 대부분은 미술시장에서 인기가 높아 고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의 창작활동은 음악계에서도 계속되어 락밴드인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프로듀싱하며 당시 펑크록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앤디워홀의 스튜디오이자 작업실인 [팩토리]에는 드래그 퀸, 보헤미안, 작가, 할리웃의 부유층 등 하이컬처에서 언더그라운드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예술창작활동을 함께 하게됩니다.

앤디워홀의 고향인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워홀 박물관에서는 엄청난 수의 작품과 앤디워홀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개인 예술가 박물관으로써는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미국 팝아트의 거장

그는 일생동안 회화, 조각 등의 미술, 영상, 음악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예술가적 기질로 하이컬처에서 언더그라운드까지 폭넓은 활동을 했습니다. 

앤디워홀은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Andle Worhola)로 아버지 온드라디 워홀(Ondrady Wowhol, 1889~1942)과 어머니 줄리아 워홀(Hall, 1892~1972)의 네번째 자녀로 태어납니다. 부부의 장남은 온드라디와 줄리아의 조국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 오기전에 사망했습니다. 그 밖에 두 형제 폴 워홀(1922-2014)과 존 워홀(1925-2010)이 있습니다. 

앤디워홀의 부모는 우크라이나인으로 현재의 슬로바키아 북부에 위치한 미코바에서 온 이민자였습니다. 아버지는 1914년 미국으로 이민왔으며 어머니는 앤디워홀의 조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1921년 뒤늦게 미국으로 오게됩니다. 앤디워홀의 아버지는 미국에서는 탄광에서 일했고 워홀 일가는 피츠버그 옆 오클랜드에서 살았습니다. 독실한 가톨릭계 부모 밑에서 거의 매일같이 성 요한 비잔틴 성당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워홀은 얼굴과 손발에 경련이 일어나는 신경계 질환인 시드넘 무도병에 걸리게 됩니다. 또한 몸에서 색소를 잃기도 했습니다. 이후 워홀은 종종 심기증에 걸려 병원과 의사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학교에도 못 가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모친의 곁에서 병석에 누워있는 상태로 은둔형 외툴이가 되어 모친에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침대에 틀어박혀 어머니 곁에 늘 붙어 있던 어린 시절에도 자신의 개성을 키웠습니다. 워홀은 라디오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수집하며 칩거생활을 즐겼습니다. 후에 워홀은 이 은둔형 외톨이 시절은 자신의 정체성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훗날 예술적 재능의 뿌리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워홀이 13세 때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5년 워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피츠버그대에 입학하여 미술교육을 공부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교사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피츠버그 카네기공대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워홀은 상업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에 워홀은 모던 댄스클럽과 보자르 아트 소사이어티에 참여했으며 학생 미술지 Cano의 미술 디렉터를 맡아 1948년 표지 일러스트를 맡았고, 1949년에는 전 페이지의 일러스트를 담당했습니다.

워홀은 1949년 픽트리컬 디자인에서 미술학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으로 이동하여 잡지 일러스트와 광고로 업무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상업 일러스트레이터의 시대

1950년대 워홀은 신발광고에서 개성적인 잉크드로잉을 그리며 지명도를 높여갔습니다. 이때의 작품에서는 특히 아이밀러사의 구두광고가 유명합니다. 1952년에는 아이밀러 구두점의 광고 디자인이 신문광고미술 부문에서 아트디렉터스 클럽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보그 등 패션지 광고와 윈도우 디스플레이 광고도 하게 됩니다.

1952년 첫 개인전 [트루먼 카포티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15개의 드로잉]을 개최하였으며 장소는 보도르 갤러리로 트루먼 카포티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전시했습니다. 이때까지의 작품은 아직 팝아트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50년대에 개인전을 여러차례 더 열었지만 이 시절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에 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1952년 친구와 댄서들과 함께하는 공동생활에서 아파트 생활로 옮겨 어머니 줄리아를 뉴욕으로 불러 생활하게 됩니다. 줄리아는 원래 레터링에 능해 워홀의 일러스트에 글을 쓰는 어시스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코를 수술하고 가발을 착용하며 이름을 본명 앤드루 워홀러에서 앤디워홀로 바꿉니다.

이 lprp의 워홀기법은 블롯티드 라인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데 카네기공대시절 개발한 것으로 비흡수성 종이 위에 그린 선화에 잉크칠을 한 뒤 종이를 입혀 전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기법으로 그려진 선들은 군데군데 번지거나 선이 사라지면서 앤디워홀 특유의 섬세한 선 표현을 만들어냈습니다.

또 1950년대에는 음반업계에서는 비닐음반 생산, 하이파이, 스테레오 녹음이 동시에 확대되어 가는 시기로 RCA음반에서 음반커버와 광고 디자인 업무를 워홀에 의뢰하게 됩니다. 워홀은 이즈음 그림 제작의 수단으로 실크스크린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로잉을 포함한 회화의 초기 실크스크린 작품은 그 후 곧바로 사진작품으로도 사용됩니다.

팝아트로 전향하기 이전 워홀의 상업예술시대의 실크스크린 기법은 팝아트계에서 특히 판화작품과 관련된 형태로 혁신적인 기술을 가져왔습니다. 블로티드 라인 스타일을 사용한 워홀의 50년대 작품에는 자동차, 신발, 초상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앤디워홀

1950년대 작품 – 앤디워홀

팝아트

1960년대에 워홀은 팝아트의 개인전도 시작합니다. 뉴욕의 휴고 갤러리와 보드리 갤러리에 전시를 열었고 캘리포니아의 경우 로스앤젤레스 펠러스 갤러리에서 1962년 7월 9일 첫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때 32점짜리 캠벨 수프캔을 그린 캔버스를 진열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오늘날 애디워홀의 팝아티스트로서 데뷔한 전시회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캠벨스프 통조림

캠벨스프 통조림 1662년 작

워홀의 뉴욕에서의 첫 팝 아티스트로서의 개인전은 1962년 11월 6일부터 24일까지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이었습니다. <마릴린 2연화><100개의 수프캔><100개의 콜라병 ><100달러지폐>등의 작품을 전시하였으며 이 개인전에서 1963년 제작한 워홀의 영화 [슬립]에서 스타를 연기한 시인 존 코르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1960년대의 워홀은 달러, 버섯구름, 전기의자, 캠벨 수프캔, 코카콜라병 등 지극히 미국적인 오브제와 마릴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 말론 브랜드, 무하마드 알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미국의 스타들을 모티브로 한 실크스크린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밖에 신문제목과 시민운동을 공격하는 경찰견 사진 등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제작되었습니다.

앤디워홀-코카콜라

앤디워홀-코카콜라

이런 작품들 제작하고 있던 시기에 스튜디오이자 작업실인 팩토리를 창설하여 팩토리에는 아티스트는 물론 뮤지션, 작가, 언더그라운드 등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워홀의 팝아트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또한 논쟁을 수반하였는데 워홀은 코카콜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나라의 멋진 점은 미국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가 가장 가난한 사람과 같은 상품을 구매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TV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고 대통령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리즈테일러가 코카콜라를 마시고 그리고 일반 대중또한 코카콜라를 마신다. 코카콜라는 코카콜라이며 구석에서 부랑자가 마시는 콜라보다 맛이 더 좋은 콜라는 없다. 모든 콜라의 맛은 같고 모든 콜라는 훌륭하다. 리즈 테일러도 대통려도 그리고 일반 대중들도 이해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시는 1964년 어퍼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린 [아메리칸 슈퍼마켓]입니다. 이 전시에서는 전형적인 미국의 작은 슈퍼마켓을 표현한 설치미술에서 통조림, 고기, 벽 포스터 등으로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워홀을 비롯하여 빌리애플, 메리이먼, 로버트 월츠 등 6명의 팝 아티스트가 참여하였습니다. 워홀의 캠벨깡통 스프그림은 1500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사인이 담긴 캠벨 깡통은 6달러에 판매되었습니다. 이 전시는 앤디워홀이 얘기하고자 하는 팝아트와 예술이 무엇인지를 일반시민들에게 직접 들려주었던 첫번째 큰 행사였습니다. 

앤디워홀 슈퍼마켓

The American Supermarket 1964 (Paul Bianchini’s Upper East Side Gallery, NY)

콜라보레이션 활동은 앤디 워홀의 모든 작업에 걸쳐 빈번하게 사용된 방법 중 하나이며 특히 196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콜라보레이션 작업 중의 하나는 시인이자 사진가, 영화감독이기도 한 제럴드 말랑가와의 작품이었습니다. 말랑가는 워홀과 실크스크린, 영화, 조각 그 외에도 다양한 작품에서 협업활동을 했습니다. 이 밖에도 온다인, 빌리 네임, 브리지 베를린 등이 팩토리를 다니며 앤디워홀을 어시스트했습니다. 

워홀의 팩토리에서는 이들을 어시스턴트라고 불렀지만 상하관계는 없었습니다. 워홀은 어시스턴트로부터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시스턴트이자 콜라보레이터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워홀은 니코, 이디 세지윅, 비바, 울트라 바이올렛, 재키 커티스, 캔디 달링 같은 보헤미안이나 카운터 컬쳐이 저명인사들을 다수 팩토리로 초대하여 그들을 슈퍼스타라고 불렀습니다. 슈퍼스타로 불린 사람들은 모두 팩토리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특히 뉴욕 언더그라운드 아트와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인 작가 존 조르노와 영화감독 잭스 스미스 역시 1960년대 워홀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워홀총격 사건

1968년 7월 3일 과격파 페미니스트인 밸러리 솔라나스가 팩토리에서 워홀과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마리오 아마야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총격하기 이전 솔라나스는 팩토리의 단골이었지만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는 적었으며 팩토리 내에서 소외된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학대를 받았던 솔라나스는 남성을 증오했고 본인이 레즈비언임을 자각하고 동료를 찾아 시골에서 뉴욕으로 상경했습니다. 그러나 뉴욕에서 노숙자가 되어 매춘을 하며 살게 되는데 남자를 싫어하면서도 남자에게 구걸하는 처지에 놓여 점점 남성혐오가 심해지게 됩니다. 1967년에는 SCUM(남성근절협회)를 출판하여 남성혐오에 대하여 소리높여 외치는 과격파 페미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앤디워홀

앤디워홀의 팩토리

이러한 그녀의 강렬한 캐릭터에 주목한 워홀은 1968년 제작한 영화 [어 맨]에 그녀를 출연시킵니다. 여기서 그녀와 워홀 사이가 엇갈리게 되는데 워홀은 솔라나스를 사이코의 구경거리 정도로 출연시킨 반면 솔라나스는 자신이 워홀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솔라나스의 워홀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가 더해갑니다. 

솔라나스는 습격 이튿날 체포되는데 그녀는 저격 이유에 대하여 워홀이 그녀의 인생을 너무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솔라나스는 결국 정신병원에 3년 동안 강제 입원하게 되었고 총격사건 이후 팩토리는 출입과 행동이 엄밀하게 제한받게 되어 자유로운 예술활동의 근거지였던 팩토리의 60년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비즈니스 아트와 파티 

1960년대 워홀 작품의 성공과 화제성에 대비하여 후일에는 작품의 제작보다 사업에 치중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는 비교적 조용한 10년이 됩니다.

밥 코라셀로에 따르면 워홀은 이 무렵 부유층 패트론의 주문초상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합니다. 워홀이 만든 초상화 작품으로 유명한 것은 이란국왕인 모하마드 레자 파프라비, 국왕의 아내 팔레비 여왕, 국왕의 딸 아슈라프 팔레비, 믹 재규어, 라이자 미네리, 존 래논, 다이아나 로즈, 브리짓 바르도 등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워홀의 초상화 작품은 1973년 제작된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의 초상화 작품입니다.

앤디워홀 마오쩌둥

Mao Tse-Tung 1973년 작

또한 제럴드 말랑가와 함께 1972년에 대중문화를 소재로 하는 잡지인 [인터뷰]를 창간하고 1975년에는 자서전 [앤디워홀의 철학]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워홀은 돈벌이는 아트이고 노동은 아트이며 좋은 사업은 가장 좋은 아트라고 말했습니다. 앤디워홀TV 등 TV프로그램의 제작도 시작하게 됩니다. 

워홀은 파티를 좋아해 맥스캔자스 시티를 중심으로 뉴욕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연일 파티를 열었습니다. 단지 워홀 자신은 말이 없어 과묵한 편이었고 수줍음이 많았으므로 파티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파티를 여는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미술 비평가 로버트 휴스는 그런 워홀을 유니언 스퀘어의 하얀 두더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앤디워홀 매거진

앤디워홀이 창간한 매거진

앤디워홀의 사망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오전 6시 32분 뉴욕의 맨해튼에서 사망합니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워홀은 뉴욕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담낭 수술을 하며 좋은 경과를 보이고 있었으나 잠을 자던 중 갑작스러운 부정맥으로 인하여 사망했다고 합니다. 수술의 필요성이 진단되기 전부터 원래 워홀은 병원과 의사를 싫어했으며 정기적인 검진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사망의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68년 저격사건 이후 건강상태가 점차적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워홀의 가족은 병원의 관리가 부실했다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병원 측의 부적절한 치료가 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병원측은 의료 오진을 곧바로 인정하여 워홀의 가족은 병원 측에서 위자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피츠버그 세인트존 가톨릭 공동묘지의 부모 옆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사망후 4월 1일 뉴욕 세인트패트릭 대성당에서 추모미사가 열렸습니다.

앤디워홀의 유산은 약 6억 달러 규모로 알려져 있으며 워홀이 생전에 모은 미술품과 골동품, 가구 등은 경매에 부쳐져 약 20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는 앤디워홀 시각예술재단이 창설되면서 앤디워홀과 관련된 저작권 비즈니스 외에도 워홀의 유지에 따라 장래성 있는 작가를 지원하는 예술지원사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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